[합격수기] 인생에 3번 좌절한 내가 공무원시험 붙기까지
○○○/일반행정 9급(2008년 합격)
이번 합격 수기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된 동기(1회)와 시험 공부 방법을 2회로 나눠 게재합니다. 본인의 요청에 따라 실명을 공개하지 않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1회] 유서를 쓰다
1. 군생활의 추억
새천년이 시작되는 해인 2000년 4월 6일 대학교를 휴학 없이 다닌 나는 군대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입대하게 됐다. 많이 힘들고 지칠 때도 있었지만 중위로 진급하자마자 고등학교 때부터 만나온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을 했고 첫딸을 낳았다. 비록 강원도 화천의 시골마을에서 가진 것 없지만 행복하게 살았고 일 또한 열심히 임해 나름 인정받는 장교였다. 2004년 둘째 아들을 낳고 장기복무지원을 했으나 노력이 부족했는지 아님 능력이 부족한 탓인지 결국 탈락했고, 그때부터 내 인생의 하향곡선이 시작됐다.
2005년 겨울이었다. 눈은 많이 왔지만 날씨는 화창한 어느 날이었다. 예하부대 혹한기 훈련 통제를 나간 차에 군용 지프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다. 제대를 6개월가량 남겨놓고 난 사고였다. 당시 허리를 크게 다쳐 수술을 했지만 몸이 좀처럼 나아지진 않았다. 부양해야 할 아내와 두 아이 생각에 살길이 막막했고 몇 개월 후 제대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 정말 암담했다.
몸이라도 정상이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의자에도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뛰지도 못하는 처지인 나 자신을 볼 때마다 밀려오는 좌절감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도 없었다. 아내는 내 몸이 좋아질 때까지 무슨 일이든 해보겠다고 하며 나를 위로했지만 17살에 만나 나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아내에게 그런 큰 짐을 주는 것이 몹시도 미안하고 가슴 아팠다. 그렇게 나의 군 생활 6년이 마무리 돼 갔고 인생의 하향곡선이 시작된 것이다.
2. 첫 번째 실패
아픈 몸으로 육군 대위로 제대를 하고 아무런 희망도 그 어떤 대책도 없이 부모님 집에서 얹혀살고 있었다. 부모님 뵐 면목도 없었고 아내는 몸이 불편한 나를 대신해 식당 주방 일을 시작했다. 밤 10시가 되도록 일을 하고 돌아오는 아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그저 몸이 좋아지기를 바라며 재활운동을 열심히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처남이 동업을 하자고 했다. 나이가 같았던 터라 서로 잘 통해 곧바로 결정을 했고,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군대에서 모아온 적금과 퇴직금이 있었고 처남과 합치면 조그마한 가게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돼 시작한 일이다.
대학교 앞에 민속주점을 차려 장사를 해 볼 양이었다. 그 주점은 전에 장사를 해오던 장소이고 월매출을 확인해 보니 동업을 해서 수익을 나눠도 꽤 괜찮을 것 같았다. 개업을 하고 예상외로 장사가 잘 되는 것이었다. 대학교 앞이라 그런지 사람들도 많았고, 아내가 주방에서 음식준비를 하면 처남은 서빙을 했다. 물론 나는 몸이 불편해 일을 도와주지는 못했지만 아내도 자기 친오빠와 함께 일을 하면서 마찰 없이 잘해냈고 밤장사라 그런지 새벽 늦게 아내가 들어오는 게 안쓰러웠지만 열심히 살려고 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무척이나 컸다.
개업을 하고 4개월쯤 됐다. 우리 가게 도로 건너 앞 건물의 1층에서 리모델링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됐고 처음에 우리는 식당이나 삼겹살집이 생기는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가게보다 훨씬 크고 깨끗한 민속주점이 개업을 한 것이었다. 동종업을 하게 되니 당연히 매출이 반으로 줄게 되고 종래에는 인건비조차 나올 수 없게 됐다. 결국 우리 가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보증금만 받고 사업을 접었다. 아내가 장사를 하면서 그 수입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고 나는 공부를 하면서 취업준비를 해왔었는데 기대했던 사업이 망해버리니 앞길이 막막했다. 또다시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는 순간이 닥친 것이다.
3. 유서를 쓰다
그렇게 아내도 나도 지쳐갈 때쯤 허리가 점점 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를 펼 수도 없었고 걸어 다니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국 다시 병원을 찾았더니 수술한 허리 말고도 두 군데나 더 디스크가 터져 신경을 누르고 있었다. 병원에서 하는 말이 12시간 이상 대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또 한 번 수술대에 올라야 했고 병원에서 하는 말이 척추에 쇠를 박고 인공으로 디스크를 심어야 한다고 했다.
돈도 꽤 많이 들었다. 겁도 났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두려운 마음에 입원병실에서 아내가 자는 틈을 타 유서를 썼다. 남들 다하는 수술이지만 나에게는 수술이 걱정되기보다 수술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더 걱정이 됐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수술대에서 안 깼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유서를 쓰면서 침대에 기대자고 있는 아내를 보며 미안한 마음이 북받쳐 밤새 눈물을 쏟아냈다.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잘 마쳤고 몸도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걸어 다닐 수 있을 때쯤 아내는 칼국수 집에서 주방 일을 맡아 하게 됐고 나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꾸준히 운동을 했다. 수술을 하고 몸이 조금 나아질 무렵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게 됐고, 해당 등급이 돼서 연금도 받기 시작했다. 아내가 일을 해서 번 수입과 유공자 연금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버틸 수 있었고 이제 내가 취업만 하면 모든 게 잘 될 것만 같았다. 그 무렵 나에게 두 번째 실패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4. 두 번째 실패
2007년 여름이었다. 어느덧 제대한 지 1년이 됐다. 당시 주가가 계속 올라가고 있었고 너도나도 주식투자에 열을 올릴 때였다. 시골 친구 녀석 중에 주식을 해서 수익을 꽤나 본 친구와 술을 마실 기회가 생겼고, 그 친구의 권유로 몸이 불편한 나는 집에서 주식을 하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경제개념도 제대로 없는 내가 지푸라기라도 잡아 볼 심정으로 시작한 것 같고 흘러버린 시간이 안타까울 뿐이다.
첫 시작은 꽤 좋았다. 물론 주식을 시작하기 전에는 주식관련 책을 사서 모조리 읽고 공부도 많이 했다. 운이었는지 실력이었는지 모르겠지만 400만원으로 시작한 돈이 1000만원이 넘어갔고 그 돈을 밑천 삼아 하루하루 고수익을 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아내도 처음엔 말렸지만 매달 버는 돈이 회사원 두세 달 수입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고는 구태여 주식을 못하도록 막지는 않았다.
그동안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혼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 밥을 먹이고 어린이집을 보낸 후 식당에 일을 나가 밤 10시에 오는 아내, 그래도 힘들다는 말없이 묵묵히 일을 다니며 내 몸 걱정에 어떻게든 몸에 좋은 음식을 차려주려고 노력하는 아내였다. 주식을 시작하고 생활이 넉넉해져 얼마 후 아내도 일을 다니지 못하게 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주식투자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고 통장을 확인할 때마다 쌓여가는 숫자를 보며 이제 내 인생에 실패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나 욕심은 더 큰 욕심을 부르게 되고 그 욕심에 모두 잃게 된다는 법칙을 뼈저리게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2007년 7월부터 외국인 투자자의 매도가 시작됐고 하루하루 번 돈을 다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잃은 돈을 한 번에 만회하고자 더 큰 돈을 투자하면 더 큰 돈을 잃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 두 달여 동안 꽤 많은 돈을 날리게 됐다. 돈을 쉽게 벌고 허무하게 잃게 되는 경험을 하고 보니 돈은 열심히 일해서 일한 만큼 벌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됐고 내가 세상을 너무 쉽게 봤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두 번째 실패가 왔지만 나에게는 많은 경험을 가져다 준 계기가 됐고 그 후 새로운 도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5. 도전. 그리고 다가오는 희망
군대에서의 사고, 민속주점 사업 실패, 주식투자 실패… 세 번의 큰일을 겪고 난 후 “나는 더 이상 안 되는구나”, “나는 운이 없다” 등 좌절에 휩싸여 디디고 일어설 힘조차 없었고, 다시 어떤 일을 시작할 용기도 없던 시간이 정처 없이 흘러갔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제대한 지도 어느덧 1년 3개월 정도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큰 딸아이가 아침에 일어나 어린이집을 가면서 “아빠 친구들은 매일 피자 시켜 먹는다는데 우리는 피자 왜 안 시켜 줘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정해진 세끼 외에 간식거리를 먹을 형편이 되지 못했던 터라 아내는 딸아이한테 “아빠 취직하면 먹자. 조금만 참자. 엄마가 더 맛있는 거 차려서 준비해 놓을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미안하던지 아내 몰래 밖으로 나가 피자집에 전화를 걸어 딸아이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제일 비싼 피자를 시켜 주었다. 두 아이는 정말 맛있게 먹는데 아내는 방안에서 조용히 빨래를 개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너무 마음이 아팠지만 아내에게 어떤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아내는 나에게 공무원 준비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했다.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할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그러나 많게는 몇 백대 일의 경쟁률과 2∼3년 이상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들었기에 시작조차 할 엄두도 내지 않았다. 더군다나 군대에서 6년 동안 군대업무만 보다가 나온 놈이 영어나 법 과목을 공부해서 공무원을 준비하는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합격할 거라는 기대조차도 애초에 갖지 않았다.
6. 끝이 보이지 않는 시작
수없이 고민하고 고민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합격할 수 있을까?… 한 번의 사고와 두 번의 실패. 나 스스로 이것이 하향곡선의 마지막이라 믿고 싶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공무원이 뭐 대단한 직업은 아닐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가정의 안정과 무엇보다 두 아이에게 떳떳한 아빠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가지는 아내의 믿음이었다. 당신은 할 수 있는, 아니 하면 반드시 되는 사람이라는 굳은 믿음을 심어줬다. 그렇게 해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는 맘을 먹게 됐다.
처음에는 공무원시험학원 야간반을 다녔다. 아내가 낮에 일을 하던 터라 오후시간 때 아이들을 챙겨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원을 다니던 두 달이 지나고 모의시험을 봤다. 두 달 만에 당연히 성적이 나올 기대도 없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문제를 봐도 아는 것이 전무했다. 공부해야 할 방향도 전혀 잡지 못했다. 2008년 국가직 시험을 6개월 정도 앞둔 시점에서 도무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어디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몰랐다. 아내는 마냥 내가 공부한다고 안심하는 눈치였지만 내 맘은 타들어 갔다. 한 시간 이상 앉아 있으면 허리에 통증이 왔고 “역시 나는 안 되는 건가”라는 자괴감에 빠지게 됐다.
그러나 시작한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방법을 바꿔보기로 결심했다. 집근처의 독서실을 잡고 매일 아침 7시쯤 독서실로 가서 밤 12시가 넘어서야 집에 왔다. 그러나 낮잠을 많이 자고 밤에 늦게 자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새벽잠을 설치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잠을 설치다보니 낮에는 집중이 되질 않았다. 공부시간을 조절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나는 오전 12시경 독서실에 갔고 새벽 2시에 집에 돌아와서 아침까지 공부를 하다가 7시쯤 잠을 잤다. 결과는 효과적이었다. 책을 반복해서 보다보니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동영상 강의는 조용한 새벽시간을 이용해 집중해서 들었다. 점점 시험일이 가까워오면서 성적도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공부를 시작한지 8개월 만에 국가직 공무원 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8개월 만에 붙을 거라는 기대는 안했지만 내심 혹시나 하는 맘으로 시험에 임했다. 아침에 아내가 미역국을 끓여주었다. ‘미역국을 먹으면 시험을 망친다’는 속설이 있지만 나는 아내가 끊여주는 미역국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었고 미역국을 먹으면 속이 편안해서 특별히 아내에게 준비해 달라고 한 것이다.
첫 시험이라 그런지 정말 떨렸다. 시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떨어졌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가 있었다. 시간안배를 잘 못했기 때문이다. 국어·영어·한국사·행정법·행정학 5과목을 보는데 영어는 제대로 풀어볼 시간도 없었다.
얼마 후 결과는 역시나 불합격이었다. 아내는 미역국을 먹어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절망하거나 좌절할 시간도 부족했다. 다음 지방직 시험이 한 달 앞에 있기 때문에 바로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했고 그 때부터는 하루에 4~5시간 정도 잠을 자고 공부한 것 같다. 독서실 구석 책상에 홀로 앉아 공부하면서 배가 고파질 때면 배고파하는 내 모습이 싫을 정도로 열심히 한 것 같다. 밥 먹는 시간 20~30분이 아까워서 독서실 앞에 있는 분식집에서 간단히 끼니를 채우기 일쑤였다.
그렇게 미친 듯이 공부를 했던 날이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었다. 장대비가 하늘에 구멍이 뚫린 양 내리는 날이었다. 저녁시간이 돼 배가 고파 밥을 먹어야 하지만 1분 1초가 아까워 분식집 앞 가두에서 파는 닭꼬치를 3분 만에 후딱 먹고 독서실로 들어가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했는데 합격 못하면 어쩌나’, ‘언제까지 공부를 해야 할까?’ 합격을 해야 공부하는 생활이 끝이 나는데 그 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불안감이 몹시도 나를 괴롭히던 때였다.
7. 새로운 가족
지방직 시험을 보고 난 후 그럭저럭 괜찮게 본 것 같아 며칠을 쉬었다. 아내와 함께 모처럼 쉬며 보내고 있는데 아내가 갑자기 자신의 몸이 이상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살도 부쩍 많이 쪘고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다며 함께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우리의 예측이 맞았다.
산부인과를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에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못했다. 셋째 아이를 가질 거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고 더군다나 우리는 셋째 아이를 가질 형편이 되지를 못했다. 아내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시어머니한테 가자고 했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결정하기 힘드니 시어머니한테 여쭈어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니 하시는 말씀이 ‘복덩이리가 들어 온 거니까 당연히 낳아야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지나고 보면 잘했다고 생각할 거야’라고 하시며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마냥 좋아하셨다. 아내는 결심을 한 듯 했고 나도 결정했다. 7살 딸아이와 5살 아들놈에게 동생을 만들어 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경제적으로 더 힘들어질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셋째 아이까지 생기니 나 자신에게 채찍질을 할 수 있는 핑계거리가 더 생기고 그만큼 어깨가 더 무거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깨가 더 무거운 만큼 더 노력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 날 저녁 우리 네 식구는 없는 형편이지만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것을 모두 축하하고자 패밀리레스토랑에 갔고 정말 배불리 먹었다. 웃고 떠드는 두 아이의 얼굴을 보며 우리에게도 조만간 희망이 올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8. 상향곡선을 타다
지방직 시험을 1점 차이로 떨어지고 비록 합격은 못했지만 희망이 보였다. 방향을 전환해 행정직이 아닌 경찰직이나 교육행정직을 준비해 볼까도 했다. 나이가 있는 만큼 7급 시험도 함께 준비했다.
그러나 2008년 7월에 본 국가직 7급 시험은 한 과목 과락으로 떨어졌고, 서울시 지방직 시험은 합격선에 훨씬 미치지 못해 떨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공부한 지 10개월 만에 4개 시험을 봤고 모두 낙방한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다. 나를 굳게 믿어 주는 아내와 해맑게 자라는 두 아이 그리고 아내의 뱃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는 막내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힘이 솟았다. 수술한 허리가 아픈 것도 잊게 됐다. 몸이 많이 좋아진 것이다. 물론 공부할 때 책상에 오래 앉아 있으면 통증이 오긴 했지만 나에게는 몸이 아파 병원에 가는 것도, 아파서 쉬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됐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9월에 행정직 시험이 있었다. 전국에서 70명 정도를 뽑는 시험이다. 하반기라서 경쟁률이 높은 시험이라 결코 만만치 않았고 나를 포함한 수험생 대부분은 아마도 모의고사를 보겠다는 심정으로 시험에 임했을 것이다.
그날도 아침에 아내에게 부탁해 미역국을 먹었다. 아내는 또 떨어져서 실망하지 말고 시험을 보지 말라고 했다. 내년 시험을 준비하는 게 낫겠다는 말을 했지만 나는 지금의 내 위치, 내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비록 떨어지더라도 실망이나 후회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9. 아내의 기쁨의 눈물
그렇게 시험을 보고 난 후 11월에 결과가 나올 때까지 두 달 동안 나는 다른 직렬 공부를 했다. 내년에는 반드시 합격하겠다는 각오는 있었지만 공무원을 적게 뽑는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에 행정직만 준비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2008년 11월 초 드디어 합격자 발표를 하는 날이었다. 컴퓨터를 켜고 수험번호와 이름을 입력한 후 합격여부를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마구 뛰었고 아내는 함께 있다가 차마 못 보겠다며 방을 나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합격자 명단을 살펴보다가 내 이름 석 자가 있는 걸 발견하게 됐다. 믿기지가 않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수험번호와 비교해 봤고 내가 합격한 것이 확실했다. 그 순간의 기분은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잠시 후 밖에 있던 아내가 들어오면서 내년에 시험 보면 되니까 실망하지 말라며 나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 없이 모니터를 돌려 합격자 명단을 보여줬다. 아내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것이었다. 물론 나 자신도 공부하느라 힘들었지만 그 순간 아내의 눈물은 지나온 시간 동안 아내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알 수 있게 해 줬다. 울고 있는 아내를 안아주면서 나 또한 눈물이 났다. 아들놈이 다가와 하는 말이 ‘엄마 아빠 싸운 거예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우리는 눈물을 훔치고 크게 웃으며 아이도 함께 안아줬다. 그날은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삼겹살을 먹으러 갔고 이제 정말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10. 또 다른 시작
합격은 했지만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면접이 남아 있었다. 70명 뽑는 시험에 110명 정도가 필기 합격을 한 것이었고 결국 40여명은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군대에 오랜 기간 있어서 그런지 남들 앞에 서는 것도 떨리지 않았고, 무엇보다 인근 지역에서 함께 합격한 4명의 동료들과 스터디를 준비한 것이 큰 힘이 됐다. 스터디를 준비하면서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아 친형, 친동생처럼 지냈고, 2주 동안 정말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다.
면접당일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봤는데 운이 좋았던 건지 면접관이 물어보는 질문 대부분이 나의 군대생활에 대한 것이었고 또한 실패한 경험에 대해서도 질문해 군대생활부터 지금까지 있어온 얘기를 솔직하게 답했다.
아내는 필기 합격하고 나서는 당연히 최종 합격할 거라 굳게 믿고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는 않았다. 얼마 후 최종 합격자 명단을 보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고 이제까지 지나온 시간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됐다.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으리라.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그렇게 내 인생의 하향곡선이 끝나가고 상향곡선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11. 희망 그리고 미래
합격하고 최종 발령까지 3개월 정도 남아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못해준 남편, 아빠의 역할을 해주고 싶었다. 먼저 딸아이와의 1년 전 약속을 지켜줬다. 에버랜드에 가고 싶다는 것이다. 아내가 만삭이라 오래 다니기는 힘들었지만 우리 모두는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에버랜드를 다녀와서 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아내와 거제도로 놀러갔다. 평생 처음 가보는 펜션 앞 바닷가의 해변에서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군대에서의 사고로 힘들었던 일, 장사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던 일, 주식에 미쳐 하루하루를 보내던 일, 앞만 보고 공부하던 일 등 막상 힘들었던 시간들을 돌이켜 보니 당시에는 고생했지만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이 큰 힘이 됐던 것 같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공무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 나름대로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에게 어떤 실패가 와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내가 있고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12. 가족이 있어 인생이 행복하다
요즘은 업무가 정말 바쁘다. 며칠 전에는 열흘 만에 집에 들어갔는데 셋째 아들이 “빠빠, 빠빠” 하면서 아장아장 걸어와 안기는 것이었다. 역시 셋째 놈을 낳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 말씀처럼 이놈이 우리 모두에게 정말 큰 복을 가져다 준 것 같다.
지금까지 지나온 4년간의 모든 일들을 적어 내려가니 새삼 새롭다. 사람은 참 단순한 것 같다. 이제는 힘들었던 그 시간들을 까마득히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말도 맞는 것 같다. 그러나 노력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고 실패는 다음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된다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모든 이가 공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직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 주고 싶다.
끝으로 이번 일이 끝나고 집에 가면 아내가 좋아하는 삼겹살을 사주며 큰 소리로 얘기해 주고 싶다. 끝까지 믿고 기다려줘서 정말 진심으로 고맙고 사랑한다고….
2010. 어느 비오는 날 오후에 씀.
* 합격수기에 소개된 공부방법·교재 등은 글쓴이의 개인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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