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가진 자들이여, 도대체 왜 이러나?
정의와 불의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이렇게 질문하면 많은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정의가 이긴다.”라고 외친다. 과연 정의가 불의에 이길까? 정의란 어둠 속의 촛불 같은 것이다. 불의라는 어둠 속에서 어느 한 순간 촛불이 밝혀지면 아름다운 꽃으로 정의는 피어난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의가 불의에 이긴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그것은 착각이 아닐까? 정의가 이기는 것은 순간이고, 불의가 이기는 것은 장구하다. 촛불은 잠시 타다가 제 스스로 꺼져버린다. 그리고는 다시 어둠이 몰려온다. 그러한 진리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인간이 탐욕스럽기 때문이다. 인간의 탐욕은 역사에서 진실을 배우고 교훈을 얻기 보다는 역사의 단죄를 피해가는 교활함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쩌다 한 번, 그것도 잠시 이기는 정의가 오랫동안 힘을 발휘해온 불의를 이겼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착각이 아닐까?
요즘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오히려 책을 잘 읽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시인이랍시고, 문단활동을 한다는 개인적 사연으로 그래도 일반인보다는 책을 접할 기회가 많지만, 책을 읽다 보면 책 내용의 대부분은 내가 한 번쯤은 생각해보았음직하고,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해주는 충고 내용과 별단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변명이다. 결국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이야기들을 여기저기에서 풀어놓고 있구나 하는 생각의 함정에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책 읽는 시간보다는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내 스스로도 몇 권의 책을 쓰고 보니 그러한 생각이 더 들게 된다. 책을 쓰면서도 내내 과연 내가 이런 책을 쓸 자격이나 실력이 있는가 하는 자문을 하면서도 시간만 있으면 무슨 글이라도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도 어쩔 수 없는 병이다.
그렇지만 어떤 책은 열 번이 넘도록 읽고 또 읽는 경우도 있다. 왠지 혼자 가슴이 답답해질 때 예전에 읽었던 책의 감동을 다시 한 번 느낌으로써 그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어서이리라. 그 중의 하나가 김훈의 “칼의 노래”이다. 어제도 밤늦게까지 김훈의 “칼의 노래”를 다시 한 번 일회독하였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이렇게 이순신의 생각을 펼쳐나간다. “세상은 입을 닫았고, 하늘도 눈을 감았다.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넋을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백성들을 위해 나라를 위해 모든 건 천명에 맡기고 다시 일어서자. 내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적에게 있다.”라고...... 같은 편의 모함으로 삭탈관직당한 후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뒤늦은 선조 임금의 후회로 다시 장군으로 복귀하지만, 그에게 남아 있는 전함은 불과 열두 척, 그게 전부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길 수 없으니, 그 이길 조건을 적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는 장군의 안타까움이 절절하다.
이순신은 적군을 향한 자신의 칼을 통해, 자신을 겨눈 적과 아군의 칼을 통해 “칼의 진실”을 들었고, “백성의 눈물”을 느꼈다. 스스로 하늘을 향해 치켜든 “칼의 무게”를 버거워했고, “칼의 외로움”에 몸서리쳤다. 그러면서 조선을 다시 침범하여 생명과 사직의 위태로움을 느낀 선조로 하여금 자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리하여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적으로부터 “칼의 부활과 칼의 생명”을 절감하게 된다. 적이 자신을 살린 것이니, 어찌 적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이순신은 어쩔 수 없어 자신을 죽이지 못한 자기편을 위해 자신을 살려준 적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칼날을 세운다.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지금 21세기 대한민국도 여기저기에서 칼이 춤추고 있다. 이게 살리는 칼바람인지, 죽이는 칼바람인지 혼란스럽다. 소위 “스폰서 검사사건”이 엠비시 피디수첩을 통해 생생하게 폭로되었다. 차마 입에 담기조차 거북한, “우리는 향응 받은 후 오입까지 한 사이”라는 검사의 육성녹음이 생생하게 방송되기에 이르렀다. 우리 대법원은 “술대접뿐만 아니라 성적 접대”도 “뇌물죄”에 해당한다고 오래 전에 판결하였다. 성적 접대를 가치로 환산할 수 없지만 성적 접대 역시 뇌물죄의 이익 공여라는 것이다. 그런데 검사들이 떼 지어 가 어떤 업자로부터 술대접을 받고 매춘을 통한 성적 접대까지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으니, 어찌 이를 거짓이라 할 수 있으랴? 이러한 엠비시피디수첩 방송계획을 사전에 감지한 일부검사들의 방송차단을 위한 협박 및 회유하는 행위까지 생생한 녹음으로 보도가 되었다. 고발자에 대하여 어떤 검사가 직접 한 말, “너도 삼성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처럼 되고 싶으냐?”라며 검찰의 칼날을 세워 협박하는 모습은 시정잡배의 행동보다 더 심하고 횡포하다. 그 말속에는 삼성비자금 사건이 검찰의 칼에 의해 왜곡되게 처리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가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호통치며 협박한 검사님, 검찰의 칼은 그런 곳에 휘두르라고 당신에게 쥐어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칼이 당신 집 주방용 회칼이라도 되는가?
잘못을 저지른 검사여, 제발 자중하고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라. 함부로 칼집에서 칼을 뽑으려 하지 말라. 대법원 판례가 확고하듯, 만일 그러한 향응을 받았다면, 그리하여 향응의 사전 사후에 그의 청탁을 들어주었다면, 당신은 뇌물범죄인이고, 그 술좌석에 동석한 다른 검사들 역시 금전의 다과를 떠나 미필적 고의에 의한 공범일 뿐이다. 직무위반에 따른 내부적 징계에 그칠 사안이 아니고, 옷을 벗는 것으로 그칠 사안이 결코 아니다. 왜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조자룡 헌 칼 쓰듯 검사의 칼날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는 침묵할 권리를 그대들은 누구로부터 부여받았는가? 다행히 특별조사위원회가 민간인조사위원을 포함하여 구성되었는바, 제대로 검사가 이루어질 지 지켜볼 일이다.
또 다른 칼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오도된 칼날의 휘둘림도 무섭다. 이번 6ㆍ2지방선거의 최대쟁점은 지방자치단체는 “4대강사업” 및 “세종시원안변경”의 타당성 여부이고, 교육자치는 “무상급식”의 실시 여부라고 할 수 있다. 여야 간에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정책대립이다. 그렇다면 모든 국민들은 그러한 정책의 옳고 그름에 대한 토론 및 의견 교환을 활발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을 알 수 있고, 어떠한 정책을 지지하는가에 따라 여야 후보에 대한 올바른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러한 정책에 대한 찬반 표현을 “사전 선거운동”이라는 블랙 딱지를 붙이고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아예 하지 못하도록 봉쇄하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유권해석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헌법은 여러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한 기본권 규정들은 상호 간에 충돌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권의 보호가 그러하고, 재산권 보장과 재산권의 제한이 그러하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면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표현의 자유가 지나치면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사유재산권의 보장을 강조하다 보면 재산권의 공공성을 실현할 수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칙과 예외, 같은 기본권 중에서도 상하의 중요성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야 간에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정부의 4대강사업추진 및 학생들에 대한 무상급식 제공 여부는 공정한 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여야 어느 한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와 국민들이 어느 정책을 옳다고 판단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문제의 충돌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느 쪽을 더 보장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두 말할 필요 없이 정보제공의 보장이 더 보호되어야 할 가치이다. 국민들은 여야 후보자의 당락을 조작하기 위해 위 정책의 당위성 토론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책이 더 옳은 정책인지에 대한 토론을 하자는 것이고, 그러한 토론을 통해 자기가 옳다고 판단하게 된 정책을 지지하는 후보자에게 투표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의 입을 막겠다는 것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잘못하는 일 중에 최고로 잘못하는 일이다. 이런 사태야말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칼을 잘못 써도 한참 잘못 쓰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순신은 “칼의 노래”에서 말한다. 적이 나를 살렸다라고. 적의 칼이 나를 살리는 현상이 세계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세계신용평가기관 중의 하나인 골드만삭스사가 사기죄로 피소되어 신용평가기관의 신용이 추락하여 잘못된 판단받은 국가들이 힘을 얻고, 영국항공당국의 화산폭발로 인한 유럽영공의 항공기운행중단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것 때문에 손해배상소송을 당할 처지에 놓여 우리 대한항공의 특급수송작전이 세계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고, 한국의 검찰의 잘못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잘못이 오히려 자충수가 되고 있음을 보면서 그러하다.
그러나 칼, 칼, 칼날은 무서운 것이다. 고의적으로,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잘못 휘둘러지는 칼날은 겁이 난다. 아, 그래서 올봄이, 40년여만에 찾아온 가장 추운 봄인가 보다. 그래도 수상한 봄은 오고 있다. 저벅저벅저벅저벅 어느 군화발소리보다, 탱크바퀴의 지축을 흔드는 굉음보다 더 커다란 소리로, 그렇지만 아주 조용히 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조용히 아직은 정의의 칼날이 녹슬지 않았다고 중얼거린다.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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